우리나라 자가용의 선구자이자 1호로 명명된 '시발(始發)'의 탄생은 뼈아픈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이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에 따라 한국은 일본의 불법적인 점령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카이로회담을 통해 나라의 독립은 약속되어 있었으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해 남과 북에 미소 양군이 분할 진주함으로써 국토의 분단이라는 비참한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 우리네 뼈아픈 역사의 상처인 6.25 한국전쟁이 발발해 경기가 회복되기도 전에 또다시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1953년 07월 휴전 협정 체결로 전쟁은 종식되었지만, 우리나라의 경제는 총체적인 난국의 상황에 접어든 시기였다. 그 중 자동차는 폐허의 위기를 맞아 도시나 지방의 자동차교통은 전멸상태에 가까웠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것은 유엔군이 전장에서 쓰던 군용폐차가 쏟아져 나와 폐허였던 우리나라 자동차교통이 조금이나마 숨을 쉴 수 있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군용폐차 재생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트럭과 버스는 대부분 미군의 GMC트럭을 개조해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자가용은 귀해 미군이 불하한 폐차지프에 드럼통을 펴서 만드 상자형 차체를 씌어 재생한 후 정부고관이나 부자, 또는 인기연예인들이 타고 다녔다. 그러던 중 서울에서 정비업을 하던 최무성씨가 미군으로부터 불하받은 지프의 엔진과 변속기, 그리고 차축 등 뼈대만 이용해 드럼통을 펴서 만든 지프형의 시발을 1955년에 내놓았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국산 자가용 1호의 탄생이다. 차명은 대한민국 최초의 자동차 생산의 시작이라는 의미로 한자어 '시발(始發)'을 사용했다고 한다.
비록 지프를 닮았지만 우리 손으로 만든 첫 국산차 시발은 부속품의 국산화율이 50%나 되어 긍지가 대단했다. 처음에는 한 대 만드는데 4개월이 걸렸던 시발은 8만환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판매되었으나 쉽게 사가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 1957년 서울 창경원에서 열렸던 광복 12주년 기념 산업박람회에 출품된 시발은 뜻하지 않게 큰 인기를 끌어 최우수상품으로 선정되어 대통령상을 받아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다. 이 보도를 바탕으로 시발의 주가는 하룻밤 사이에 30만환으로 뛰어 올랐으며, 을지로 입구에 있던 천막 공장 앞에는 시발을 서로 먼저 사가려고 문전성시를 이루는 일이 다반사였다.
시발 제작사인 국제차량제작 주식회사는 대통령상을 받은 후 한 달도 못되어 1억환의 계약금이 들어와 공장을 사고 시설을 갖추었다. 특히 영업용 택시로 인기가 높아 생산 능력이 계약을 미처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을 뿐만 아니라 시발투기붐까지 일어나 상류층 부녀자들 사이에는 '시발계'까지 유행해 프리미엄을 얹어 전매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공장확장과 새로운 차 개발에 과대한 자금을 투자했고, 정부가 약속했던 보조자금이 5.16혁명으로 중단된데다가 1962년 '새나라'라는 산뜻한 일제 승용차가 대량 쏟아져 나와 큰 타격을 입은 시발은 1963년까지 총 3천대 남짓 만들어 내고는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사라져갔다.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시발은 전후 황폐했던 우리 자동차 교통 재건에 큰 공을 세운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 Editor 남태화(physcis@chol.com)
- 참조 문헌 : '자동차 이야기' - 전영선 지음